(한국문학) 기형도 지음 『입 속의 검은 잎』
* 블로그에 게재된 글의 저작권은 본 블로그 운영자에게 있으므로 모든 게시물의 무단 전재, 게재, 재배포를 금합니다.
1. 기형도
1960년 2월 16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문화부․편집부에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시집 출간을 위해 준비하던 중,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1989),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1990), 《기형도 전집》(1999) 등이 있다.
2. 『입 속의 검은 잎』에 나타난 전반적인 시 경향
어떤 사람은 시인 기형도를 ‘검은 존재론의 화신’ 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시세계에는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부터 돌출 되어진 고통과 파괴의 흉터들이 즐비하고 젊어서 세상을 등진 불우한 운명이 자아내는 죽음과 쇠락의 이미지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 시집에서 기형도 시인은 일상 속에 내재하는 폭압과 공포의 심리 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우울한 유년시절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며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 공간 속에 펼쳐보인다는 특징을 보인다.
검고 흰 무채색의 상상력, 죽음, 어둠, 두려움과 공포, 슬픔은 기형도 시의 특질이다. 『입 속의 검은 잎』의 시들은 구체적이지만 그 구체성은 그의 내부 깊숙이에 뿌리 박고 있는 과거의 기억 속을 헤매는 구체성이다. 그 기억은 어둡고 불행한 것으로 그는 소외되고 추한 것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비극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김현이 그의 시의 미학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이라고 이름 붙였듯이 그에게 현실은 환멸스러운 곳이고 꿈은 없으며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입 속의 검은 잎』의 시어들은 예측불가능한 현대문명이 그것을 떠받치는 제도화된 권력과 그 속에 감춰진 폭력, 그리고 병든 현실에 안주한 채 불구가 되어가는 우리의 영혼이 더 비참한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준다. 돌연사한 자신의 죽음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시인 기형도는 곽격하진 않았으나 결코 우유부단하지 않았던, 그리고 시대가 낳은 절망을 생의 근원적 아픔으로 끌어안은 탁월함을 보인다.
그의 시가 여전히 강한 전염성과 항구력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예감이 과장된 포즈나 선험적인 예견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속한 세계의 추한 본질을 다시금 반성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 기형도가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경 종로 2가 부근의 한 심야 극장의 캄캄한 공간에서 요절한 것은 그가 부정의 미학에서 긍정의 미학으로 나아가지 않고 지금까지 ‘검은 존재론의 화신’ 이라 불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3. 『입 속의 검은 잎』에서의 작품 및 감상
①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먼저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집’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쉼을 주는 공간이고 항상 나를 반겨주는 곳이다. 그러나 시에서 ‘집’ 이라는 공간은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쓸쓸함과 황량함을 안겨준다. 이는 도입부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는 구절과 연결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사랑을 포기하고 떠나는 심정을사랑을 빈 집에 가두고 떠나는 이의 고통스러움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집에 남겨 두고 스스로 문을 잠그는 괴로운 마음과 사랑을 분명 집에 남겨 두었지만 결국엔 모든 것은 비어 있는, 잠글 필요도 없이 비어 있음의 허망함이 그 속에서 가졌던 열망과 대조된다.
사랑은 곧 열망이다. 화자는 그 열망을 집에 가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이 떠나서 그것을 붙잡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는 그것을 오히려 ‘빈집’에 가둬두고 스스로 비정하게 잠궈 버림으로써 그 비장미와 고통이 더욱 비극적인 느낌을 준다.
화자는 밤, 안개, 촛불, 종이, 눈물들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기엔 너무나 짧았던 밤, 그리고 오직 열망만을 생각하게 했던 창밖을 떠도는 겨울안개, 사랑의 편지를 쓰기위한 촛불들과 흰 종이들, 그리고 눈물을 떠나보내고 싶어하는 화자의 마음이다. 이러한 상관물들은 고통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시인 자신의 우울한 경험 또는 그립기도 한 유년의 의미와 관련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고통의 문을 잠그고 다시 그 문을 열기 전에 시인 기형도는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돌연사를 통해 그의 작품들이 더욱 사랑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나 또한 그의 죽음이 이 시의 비극성을 부각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②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열무를 팔러간 어머니를 배고픈 아이가 기다리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조가 매우 서정적임을 느꼈다. 이는 시적 공간이 자주 듣던 옛날 이야기와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는 전체적인 상황의 제시와 함께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시의 특징을 보이는데
시간적인 면에서 보자면 1연은 화자의 어렸을 적 이야기이고 2연은 어른이 된 후의 이야기 이다. 그러나 이 두 연에서 보이는 화자의 심경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1연의 아이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배고픔에 지쳐 힘없는 어머니가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빈방에서 두려움에 가득찬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2연의 화자는 그 시절, 유년의 뒷목을 오히려 그리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2연에서는 시적 정황을 현재의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단순히 유년의기억일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자신의 삶을 아로새기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빈방, 혼자있음, 외로움등은 여전히 시인의 내부 깊숙한 곳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③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
․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이 시에서 주가되는 것은 ‘그 일’과 ‘그’ 이다. 시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힘들만큼 폭압적인 상황과 그 가운데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자의 두려움와 공포가 생생하게 나타난 ‘그 일’이란 80년 광주사건을 가리키며, ‘그’는 학살 속에 죽어간 자들을 암시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침묵을 지킨다. 폭력에 그들은 굴복해 버린 것이다. 화자 역시 방관자의 한 사람이며, 먼지 낀 책을 읽는 무력한 지식인이었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고,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먼 지방'과 `먼지의 방'은 띄어쓰기의 차이를 보여 흥미를 줌과 동시에 현실과 괴리된 공간임을 더욱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후에 ‘그’ 의 죽음을 목격한 화자의 혀는 천천히 굳어가고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못난 자신에게 있어서 용기 있게 실천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또 다른 압박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렇게 나약한 방관자들은 ‘그’ 에게 부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들의 장례식에 어떠한 말도 덧붙일 수 없는 이중의 억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화자는 시 마지막에 ‘그 일’이 어디서 터질지 모르지만 자신이 ‘택시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해도 ‘그 일’이 터지는 가장 가까운 지방으로 가야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시인 자신이 현실에 직접 관여해야 함이 옳다는 정신을 바탕을 둔 구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에서는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처음 지나는 길과 같이 황량하며 두려움의 연속이라는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뜻하는 화자의 죽음과 굴복, 타협의 징후들이 끝없이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